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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 (Heidelberg Catechism, 1563년)

 

프레데릭 3세는 팔라티네이트를 다스리는 영주로 수도인 하이델베르그의 한 낭만적인 성에 살면서, 1559년부터 1576년까지 자신의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당시 프레데릭 3세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프레데릭 3세의 통치 초기에 팔라티네이트는 성만찬 교리에 대한 이해 차이로 말미암아 루터파와 멜랑흐톤파 사이에 큰 갈등이 빚어지게 됩니다. 루터파는 그리스도 인성의 '편재성'을 가르치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 '안에, 그와 함께, 그리고 그 아래' 물리적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같은 교리는 1559년에 하이델베르그와 이웃한 영지인 뷰르뎀베르그 영지의 개혁자인 존 브렌츠에 의하여 스투트가르트 신앙고백에 포함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 신앙고백서는 멜랑흐톤의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배척한 것이 되었는데, 이후 루터파에 있어서 그리스도 인성의 편재성 교리를 처음으로 진술한 공식 문서가 됩니다.

 

당시 팔라티네이트는 루터와 존 브렌츠의 소요리문답을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형편에 다시금 스투트가르트 신앙고백이 작성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의 편재성 교리는, 멜랑흐톤의 견해를 반대하여,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공표된 것입니다. 팔라티네이트의 선제후 프레데릭 3세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루터파와 존 브렌츠의 요리문답을 대신할 새로운 요리문답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1560년 6월에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신학 교수요 교회의 감독이었던 틸레만 헤세시우스와 쯔빙글리파 교수인 디아콘 크레비츠 사이에 전개된 5일간의 공개 논쟁은, 이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인 프레데릭 3세로 하여금 새로운 요리문답의 필요성에 더더욱 다가가게끔 하였습니다. 결국 1562년 초에 프레데릭 3세는 팔라티네이트를 위한 새로운 요리문답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1563년 1월 19일자로 나온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초판의 서문에 의하면, 신학교 교수단, 감독들, 팔라티네이트 교회의 주된 직원들의 노력에 의해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화란 신학자 헨리 알팅(Henry Alting)은 팔라티네이트와 폭 넓게 접촉한 이후 1644년에 연구 결과를 밝히기를, 자카리아스 우르지누스(Zacharias Ursinus, 1534-1583)와 카스파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저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견해에 따르면, 이 둘 중의 한 사람이 기본적인 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최종적인 편자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작성자에 대한 견해는 일치하지가 않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작성이 한 팀의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입니다. 자카리아스 우르지누스와 카스파 올레비아누스가 이 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자카리아스 우르지누스는 이미 1561년에 323문답의 요리문답, 1562년에 108문의 요리문답 등을 작성한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건대, 아마도 그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작성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프레데릭 3세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서문에서, 요리문답의 작성 동기로 "우리들의 학교와 교회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강단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만일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생의 초기에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교육받게 되면, 그것은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공적 도덕과 사적 도덕, 그리고 세속적 문제와 영원한 문제에 대한 개혁을 허락하시기를 기뻐하시리라는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서 이에 따라서 가르치고, 행동하며, 살도록"이라고 했습니다. 정리해 보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작성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교리적 가르침의 틀을 제공하고, 두 번째로, 설교의 지침을 마련하며, 세 번째로, 단일한 고백서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독일어로 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초판은 1563년 2월말에 출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당시에는 아직 독일어 성경이 절로 나뉘어지지 않았던 때였던 까닭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성경 본문은 해당 문항의 맞은 편 여백에 장(章)으로만 제시되었습니다. 초판의 경우 각 문답의 일련 번호도 없었고, 지금처럼 52주로 나뉘어져 있지도 않았습니다. 한 달 후인 3월말에는 두 번째 판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 때는 '성만찬이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다루는 제 80문이 삽입됩니다.

 

카스파 올레비아누스는 칼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이 80문의 내용을 덧붙이도록 프레데릭 3세를 격려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후 곧 이어서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라틴어 판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80문에 몇 가지가 첨가된 형태로 제3판이 다시 4월경에 나타나게 되었고, 이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1563년 11월 15일자 서문과 함께 '팔라티네이트 교회의 새로운 규례' 안에 넣어져 다시 출판됩니다. 바로 이 판이 이후부터 공인 본문으로 취급됩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그 성격에 있어서 철저하게 개혁파적입니다. 도르트 회의에 참석하였던 온 유럽의 대표들은 이 사실에 이구동성으로 동의하였습니다. 한 영국 대표는 말하기를, "대륙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은 수천톤의 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내용들로 가득찬 요리문답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이같은 개혁적인 특성은, 문답의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제시한 수많은 성경 구절들에 의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그 이전에 나타났던 어떤 요리문답들 보다도 더 많은 성구들을 제시하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요리문답들은 대개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그리고 성례에 대한 부분 등등의 네 가지 중요한 내용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저자들은 이 네 가지 내용을, 비참, 구원, 그리고 감사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 '위로'라고 하는 주제로 놀랍게 구성하였습니다. 개혁자들에 의해서 성경에서 다시 발견된 복음의 위로는 요리문답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비참에 대한 첫 번째 부분은 죄를 가르치고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율법의 요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은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우리의 유일한 위로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장이 되는 성례에 대한 부분으로 마칩니다. 그리고 감사에 대한 세 번째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온전하게 구원하신 것에 대해서 신자가 하나님께 나타내는 감사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감사의 삶에 대한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세 번째 용도'를 설명하고 있으며, 주기도문에 대한 설명으로 마쳐지는데, 116문에서 그 이유를 말하기를,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원래 팔라티네이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개혁신앙을 위하여 작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전 세계의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여지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도르트 회의는 1563년에 라틴어로 작성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교회의 정식 학습교리서로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습니다. 또한 모든 목사는 임직시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그대로 믿을 뿐 아니라 반드시 가르칠 것을 서약하도록 결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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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The Heidelberg Catechism, 1563년) [한글/영문]